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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도대체 뭘 하면 재미있어요?” / 김정운

[김정운의 남자에게] “도대체 뭘 하면 재미있어요?” / 김정운
명지대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한겨레
         
» 김정운 명지대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젠장, 자기가 뭘 재미있어하는지 내가 어떻게 아나?” 나는 돌아서며 혼자 꿍얼거린다. 재미와 행복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사방에 하고 다니다 보니, 사람들은 매번 내게 묻는다. 도대체 뭘 하면 재미있느냐고. 사는 게 도무지 재미없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고통은 이해하지만, 자신이 재미있어하는 것은 오직 자신만이 알 뿐이다.

재미는 ‘존재의 근거’다. 우리는 재미있으려고 산다. 아닌가?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면 모양이 좀 빠져 보인다. 나름 폼 잡는 학자들은 온갖 까다롭고 복잡한 언어로 인간 존재의 근거를 설명한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잘 모르겠다. 철든 이후 오십이 되는 지금까지 하루도 책을 손에서 놓은 날이 없는 내가 이해가 안 되면, 그런 내용을 이해할 사람은 이 세상에 별로 없다.

학자들은 스스로 잘 이해하지 못하면 더 어렵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교수들끼리만 아는 영업비밀이다. 그래서 교수에는 세 종류가 있다. 우선,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교수. 대부분 그렇다.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설명하려니 그렇다. 둘째는 어려운 이야기를 무척 쉽게 하는 교수. 진짜 무림의 고수들이다. 아주 가끔 있다. 그러나 진짜 황당한 이들이 있다. 쉬운 이야기를 열라(!) 어렵게 하는 교수다. 셋째 부류다. 가끔 있다.

존재의 근거에 관한 내 문화심리학적 설명은 아주 단순명료하다. 재미없는 삶은 내 삶이 아니다. 당위와 의무로는 내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은 아이들을 보면 안다. 아이들은 오직 한가지 생각뿐이다. 오직 재미있을 생각. 그래서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나도 돌아서면 바로 키득거린다. 젊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도 놀고 있는 어린 자식들을 가끔 볼 때가 있다. 우리 눈에는 서글프기 한이 없지만, 아이들은 그런 거 모른다. 슬픔은 아이들의 언어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삶이란 곧 재미다. 그래서 네덜란드 문화사학자 하위징아는 인간 삶과 문명의 본질을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 정의한다.

‘뭘 하면 재미있는가?’의 문제는 각 개인이 해결해야 하지만,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가?’에 관해서는 심리학적 설명이 가능하다. 공부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공부하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할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부에 관한 경험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남의 돈 따먹으려고(!)’ 공부해왔다. 그래서 공부가 재미없었던 것이다.

내가 재미있어하는 것을 공부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사진 찍는 일을 좋아한다고 하자. 셔터 속도, 조리개를 조절해가는 방법을 배워가며 새로운 순간을 포착해낼 때마다 느끼는 희열은 폭탄주나 노래방의 그 어설픈 즐거움과 비할 바가 아니다. 자신의 성장이 확인될 때 빠져드는 그 삶의 충만함을 심리학에서는 ‘플로’(flow)라고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신의 존재조차 망각하는 몰입의 즐거움은 공부에서만 느낄 수 있다.

공부하는 ‘학교’(school)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스콜레’(schole)다. 삶을 즐긴다는 뜻이다. 삶을 재미있게 사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 학교였던 것이다. 자신이 평생 즐겨야 할 삶의 주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평생 추구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곳이 학교의 본질이다. 재미는 주체적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늦지 않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아 새롭게 학습을 시작하자는 이야기다. 다행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평균수명이 무지하게 늘어났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고, 그것에 몰입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그 엄청난 재미를 발견하기에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 지구와 우주의 평화가 내일 당장 이뤄져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모른다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아닌가?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