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의 남자에게] 이 가을, 난 아무 생각 없이 산다! | |
‘그리움’이란 마음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뜻한다. ‘그리움’과 ‘그림’은 어원이 같다고 한다. ‘긁다’라는 동사에서 그림, 글, 그리움이 모두 나왔다는 것이다. 종이에 긁어 새기는 것은 글과 그림이 되고, 마음에 긁어 새기는 것은 그리움이 되는 것이다.
우리말의 그리움은 참 따뜻하고 아름다운 단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미움과 증오와 같은 부정적 감정이 끼어들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애틋한 의미가 영어로는 잘 번역되지 않는다. ‘갈망’, ‘열망’을 뜻하는 ‘롱잉’(longing)으로 번역되나, 그 풍요로운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움을 뜻하는 독어의 ‘젠주흐트’(Sehnsucht)는 우리말의 ‘그리움’에 그 뉘앙스가 상당히 근접해 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로 이 낱말을 꼽곤 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외로움의 고통도 알고, 인생의 깊은 의미를 안다는 이야기다. 그의 시에 차이콥스키가 곡을 붙인 소프라노의 노래는 구구절절 가슴을 울린다. 심리학적으로도 그렇다. 그리움이 없다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뜻이 된다. 인간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각하는 능력이 생길까?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기가 머리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하는 심리학적 기준은 ‘흉내 내기’에 있다. 아기가 어느 순간부터 타인의 행동을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것도 한참 전에 봤던 타인의 행동을 흉내 내는 것이다. 이를 ‘지연모방’(deferred imitation)이라고 한다. 지연모방은 타인의 행동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이를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는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 정의한다. ‘표상’이란 말 그대로 어떤 대상을 머릿속에 표현하는 것, 즉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생후 약 9개월부터 이 표상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인간은 생후 9개월부터 머릿속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로 보자면, ‘그리움’과 ‘생각’은 같은 단어다. 살면서 도무지 그리운 게 없다면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가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멍하니 지내는 것도 도무지 그리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 삶의 어느 순간부터 가슴 시린 그리움의 감정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 가을이 더욱 쓸쓸한 거다. 이럴 때는 의도적으로, 아주 처절하게 고독해 보는 것도 훌륭한 대처 방법이다. 혼자 떠나는 거다. 제주도의 갈대밭을 혼자 헤매거나, 한적한 바닷가 마을, 골목을 헤매보는 거다. 며칠이고 사람과 만나지 않고,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거다. 비겁하게 누구 만나자고 전화하기 없기다. 고독해야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고,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생각이 풍요로워진다. 몇 해 전, 일본에서 정말 고독하게 지냈다. 공동연구를 하기 위해 와세다대학에 초청을 받아 일 년을 혼자 지냈다. 그때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논문도 많이 쓰고, 연구 주제도 많이 개발했다. 내 인생에서 그때처럼 생산적이고 내면이 풍요로웠던 적은 없다. 그만큼 외롭고 쓸쓸했다는 이야기다. 혼자 지내려니 가족들이 정말 그리웠다. 솔직히 아이들보다 아내가 더 그리웠다. 그때,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든, 와세다대학 교정의 낡은 벤치에 앉아, 아내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그때 우리는 서로 아주 많이 그리워했다. 요즘은 그런 전화 안 한다. 전화할 일도 없다. 어쩌다 집에서 저녁 먹는다고 전화하면 아주 노골적으로 귀찮아한다. 밤늦도록 집에 안 들어가도 아무 전화 없다. 그리움은 무슨 개뿔!
그래서 요즘 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산다. 낙엽이 이렇게 서럽게 지는데도 도무지 그리운 게 하나 없다. 아, 이렇게 맛이 가는 거다.
명지대 교수,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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