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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곡리 지명 유래-가평문화원 자료

♧ 설곡(雪谷)리

본래 양평군 북상도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소설리와 설곡, 음방, 양방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이들 중 소설(小雪)과 성곡(城谷)의 이름을 따서 설곡리라 하였고, 일설로는 소설리와 성내(城谷)에 유독 눈이 많이 내려 설곡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가평군지 p1111 참조)

설곡리는 위곡3리와 엄소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비치고개를 넘어, 엄소리 구역을 지나면 설곡리가 시작되며, 동쪽으로는 강원도 홍천군과 서쪽으로는 설악면 방일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곳 설곡리에는 100여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자연부락으로는 동면 중촌, 왕방, 양지말, 성곡, 응달말(용소골) 유분동 등으로 나눌 수 있다

 

♡ 동면(뎅면) 

엄소리를 지나 설곡리에 다다르면, 영은교회 수양관이 도로 좌측에 위치해 있고, 조금 더 가면 하천을 건너는 교량이 동면교로 이곳이 바로 동면 마을이다.

 

동면 부락은 용마를 매어 두었다는 구멍 뚫린 용마 바위가 있고, 마을 생김이 약간의 경사를 이룬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라 하겠다. 이곳에는 약 3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중촌(中村)

설곡리의 중심마을로 마을회관과 설곡교회가 있다. 미원초등학교 설곡분교가 이 곳 묵안리로 넘는 고갯길 우측에 자리잡고 있으나, 폐교되어 건물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으며, 묵안, 왕방골, 성곡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1368년 공민왕의 국사(國師) 보우(普愚)스님이 이곳에 소설사란 절을 짓고, 생전에 못다 한 부모님께 효성을 드리기 위해 불공으로 은공을 대신했다는 이야기는 불가의 효행으로 손꼽히고 있으니, 지극한 효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 임제종(臨濟宗)의 시조로서 유명한 보우(普愚)스님은, 1301년(고려 충열왕 27) 이 곳 설곡리에서 홍연(洪延)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자하고 총명하였으며, 글을 좋아하여 이웃의 칭송을 받았다.

13세 때 출가하여 회암사에 들어가 중이 되고, 24세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였으나, 영욕을 버리고, 용문산 상원암(上院庵)에 들어갔다가, 다시 서울 삼각산에 절을 창건하고, 태고사(太古寺)라 하였다. 45세 때 중국에 가서 청공(淸珙)의 법을 이어받아 임제종의 시조가 되었다. 47세 때 설악면 설곡리에 들어와 소설암(小雪庵)을 짓고, 속세의 부모님께 못다 한 효성을 불공으로 대신하며 도를 닦았으나,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그를 왕사(王師)로 받들어 개성 광명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국사(國師)로 있던 신돈(辛旽)이 국정을 다스림에 횡포와 부패가 심하여, 그를 미워한 나머지 왕사도 사직하고 다시 소설암으로 돌아오게 된다.

1371년(고려 공민왕) 신돈이 부정부패로 신임을 잃고, 끝내 수원에서 참형되자, 공민왕은 보우 스님을 국사(國師)로 모시기 위해 설곡리 소설암을 직접 찾아와 국사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하여 설악면은 당시 미원장(迷源莊)이었는데, 미원현(迷源縣)으로 승격되었다.

1374년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국사를 사퇴하고 영원사(塋源寺)에 머물다가, 다시 소설암으로 들어와 1382년(우왕 8)에 열반하였다. (가평의 자연과 역사 p244 참조)


 

♡ 왕방(王訪)

중촌부락에서 동쪽으로 오르는 곳인데, 고려 공민왕이, 소설암에 머무는 보우스님을 만나러 찾아온 곳이라 하여, 왕방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지금은 왕방(旺坊)이라고 쓰는데, 왕성할 왕(旺)자와 동네 방(坊)자를 합성한 것으로 보아 산골 마을로는 상당히 번성한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왕방골에는 현재 5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나, 화전정리 이전에는 많은 가구가 거주하였다고 한다

 

♡ 양지말

중촌에서 성곡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너 마을에 있는 응달말과 대조되는 부락이다. 이곳에 3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마을 앞 도로변에 있고, 이 마을 입구에는 옛날 온수(溫水)가 나와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효험이 탁월하여, 전국에서 많은 환자가 찾아와 흥청거렸다고 한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되어, 각종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이곳에 들끓게 되자, 이 마을에 병이 전염될 것을 싫어 한 이 마을의 최씨 성(崔氏 姓)을 가진 사람이 온수(溫水)에 개를 잡아넣고 휘저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는 온수물의 약효가 떨어져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고 한다. 그 최씨(崔氏)의 꿈속에 온수 신령(溫水 神靈)이 나타나 "내가 너 때문에 부정(不淨)을 탔으니 온양(溫陽)으로 내려가, 500년 뒤에나 다시 이곳으로 올라오겠다."고 하였다. 아직 500년이 되지 않았는지, 지금은 약효(藥粝)도 없고, 온기도 없는 물만 나오고, 또한 도로 포장과 아울러 관리 부실로 고갈된 상태에 이르고 있다.

이 곳 양지말과 응달말(용소골)에는 민가가 약 10여가구 이상 거주하고 있다.

 

 

♡ 성골(城谷)

양지말과 근접된 부락으로, 산이 마치 성처럼 둘러 쌓여 있어서, 매우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로 정감록에 기록된 피화지지(避禍之地: 피란처) 또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열 개안에 드는 명승지)로 "楊根致北四十里有小雪<양근 북쪽 약 40리에 소설이 있다>"이라는 기록이 이 부락을 지칭한 것이라고 한다.

성골에는 곰이 살았다는 "곰굴"이라는 자연동굴이 있는데, 입구는 겨우 사람하나 기어 들어갈 크기이지만, 안은 매우 넓다고 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주민들이 이곳에 들어가 숨어 피난을 하였다 하나, 아직까지 끝까지 들어가 조사하여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옛날 대마초를 대량 재배하던 "삼밭골" 계곡을 따라 오르면, 강원도 홍천군과 경계를 하고 있는 "가락재" 고개가 나온다. 8. 15이전 사회적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백백교가 이곳에도 있었는데, 그 당시 목조 초가 2채가 그들의 은거지로 사용되었고, 자체적으로는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경작농지가 약 만 여 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산 중턱에 만 여 평의 농경지를 개간할만한 광활한 지형이 있으니, 이를 두고 가락지처럼 생긴 고원 분지로 들어가는 고개라는 뜻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북면 적목리 조무락골(가평의 지명과 유래 상권 p262 참조)의 소개에 있듯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외부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였으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재산과 자유를 완전 박탈당했으며, 끝내는 피살되었다 한다. 일부 주민들에 의하면 백백교가 망한 뒤, 백백교의 간부를 생포하여, 그의 자백과 안내로 매장된 시체 30여구를 찾아 공동묘지에 이장하였다는 목격자의 진술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 곳 성곡마을에는 약 20여호가 살고 있는데, 그 중 11세대가 갈씨가 거주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타성이 없는 갈씨의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중교통수단으로는 시내 버스가 4회 왕복하는 종점이기도 하다

 

♡ 유분동(鍮盆洞 : 놋동기골)

성곡마을을 지나 무당이 패랭이(댓개비로 엮어 만든 갓의 일종)를 쓰고 춤을 추다가 빠져 죽었다는 "패랭이 소(沼)"를 옆으로 두고, 양평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봉미산 쪽로 오르면 "놋동기(이) 골"이라는 곳이 나온다.

이곳은 그 옛날 누군가 놋쇠로 만든 동기(물동이)를 갖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일설로는 놋쇠로 동이를 만들던 풀무 터가 있어서 놋동기골이라 한다지만, 정확한 근거는 찾을 길이 없다. 놋그릇 유(鍮)자와 동이 분(盆)자를 합성하여 유분동(鍮盆洞)이라고 한다.

양평군 단월면으로 넘는 고갯길(임도)이 있으나, 산악용 차량은 통행할 수 있고, 일반 차량은 통행이 어려우며, 사람통행도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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