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현존
사 25:6-9; 요 20:1-18
조헌정 목사님 설교
[부활 기사와 관련된 질문들]
성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러 제자들에게 심지어는 무려 500명 앞에 나타난 적도 있다는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부활절 단상에 서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단 한번이라도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던 예루살렘 성전이라든가 아니면 근처 시장터에라도 한번 나타나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아쉬움을 눈치 채었는지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부활의 목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그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저자에게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썩은 시체 냄새가 나던 나자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께서 사흘이 지나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얘기가 유별난 주장도 아니겠지만, 믿음이 먼저 있어야 부활 예수를 볼 수 있다는 전제는 부활의 역사성을 주장하기에는 2%가 부족합니다.
독일어에서 역사는 실증(實證) 의미의 역사(Historie)와 실존(實存) 의미의 역사(Geschichte)로 구분하는데, 우리말에서는 설명을 붙여야만 구분이 됩니다. 복음서의 증언은 이 둘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 마리아가 처음에는 동산지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음을 확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던 예수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마리아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예수를 껴안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잠깐!” 물론 ‘잠깐’이라는 단어는 본문에는 없습니다만, 예수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만지지 말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다음 날 바로 이어지는 얘기에서 예수는 의심하는 도마에게 직접 자신의 못자국과 창자국까지 만져보게 합니다. 여기서 당연히 우리는 왜 마리아에게는 못 만지게 하셨나? 혹 성차별 아니냐? 하는 항의가 나올만한 구절입니다. 글로 추측을 해보면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그리고 도마에게 나타나기까지 그 하루 사이에 하늘 아버지께 다녀오신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그렇다면 그 하늘은 우주 공간 어디에 있고, 예수는 어떻게 다녀오신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도마가 예수의 손과 발에 있는 못자국과 허리에 나 있는 창자국을 직접 손으로 만져 확인했다고 증언 또한 예수 몸의 부활 사실성에 대한 증거가 되지만, 이는 동시에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부활을 하게 되면 우리 몸에 있는 상처 자국들은 복원이 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 것인가? 수술 자국도 그대로 남는 것인가? 다리가 잘린 장애인은 다리가 잘린 채로 팔이 없는 장애인은 팔이 없는 상태로 부활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참수형을 당한 사람은 어떻게 부활하는 것인가? 제가 너무 나갔나요?
이에 비해 누가복음은 다른 방식으로 예수 부활을 얘기합니다. 예수를 따라다녔던 글레오파라는 제자와 다른 한 제자가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는데, 어떤 낯선 사람이 끼어들어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면서 한나절을 동행합니다. 그런데 그 낯선 이가 부활 예수인 것을 알아차린 때는 예수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이 아니라 그가 사라진 후에 깨달았는데, 그가 부활 예수였다는 증거는 함께 저녁을 먹을 때에 가슴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예수 부활의 실재에 대해 실증적인 접근을 했다면, 누가는 실존적인 접근을 한 것입니다.
[‘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
오늘 모든 목사들이 설교 단상에서 반복해서 말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몸의 부활’이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몸의 부활! 몸의 부활! 하는데, 부활도 문제가 되지만, 도대체 몸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몸’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복음서에서 몸은 그리스어로 인간에게서 영혼이 빠진 soma라는 단어와 단순한 물질체로서의 sarx라는 두 단어로 표현됩니다. 현대 과학에서 몸은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수십억 년 전 원초적 생명체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천체물리학에서는 138억년전 시작한 우연한 우주빅뱅 폭발로 인한 화학물질의 결합체로 말합니다. 신학에서는 하느님의 형상을 띤 다른 창조물과는 구별이 되는 신의 대리인으로 설명을 합니다. 어떤 미학자는 “몸이란 가없는 시공간내의 응축된 세계의 ‘마디’이다."라고 말합니다.(김동규,『멜랑콜리아』 22쪽)
[부활의 첫 번째 해석]
따라서 '몸의 부활'이라고 말할 때, 사람마다 자신이 갖는 경험과 지식에 따라 부활을 달리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서로 다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려야 하겠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의 증언에 무게의 중심을 두고자 합니다. 16장 8절로 마쳐지는 원 마가는 증언하기를 예수는 부활의 몸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대신에 천사가 나타나 부활 예수는 이미 갈릴리로 가셨으니 스승 예수를 만나려거든 갈릴리로 가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자 이 얘기를 들은 여성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얘기로 마가복음은 끝납니다. 여기서 두려움이 일어난 원인은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갈릴리로 다시 가라는 천사의 명령 때문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스승 예수의 뒤를 따라 갈릴리에서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곧 부활 예수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달리 말해 스승 예수의 뒤를 이은 십자가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마가가 주장하는 부활은 부당한 죽음을 당한 스승 예수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역사 진실 운동인 것입니다.
예수 공동체 안에 가장 처음 회자하기 시작한 예수 이야기는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인 예수어록이라고 불리는 Q복음서입니다. 여기에는 십자가 수난 얘기가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마가가 자기 나름의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가 아마도 이 Q복음서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를 지혜로운 스승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예수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정치권력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갈릴리의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들과 함께 하는 새 역사 창조 변혁 운동을 이어가는 일임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여기에 마르코가 자신의 얘기의 3분지 1 이상을 예수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에 일어난 수난에 집중하고 있고, 나머지 3분지 2의 전체 구조 또한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적대 틀 안에서 얘기를 풀어가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국가폭력에 의한 예수 죽음의 진실을 알리는 일과 민중의 저항 이것이 마가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후에 첨가된 마가복음서 16장 9절 이하의 부활이야기나 후기에 기록된 마태나 누가복음서의 부활이야기는 변증의 요소가 많습니다. 당시의 시대철학인 영지주의자들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잠시 인간의 몸을 빌려 오셨던 것이고 그 영은 십자가를 대신 졌던 시몬에게로 옮겨졌다고 하는 가현설에 대응하기 위해 몸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다 후기에 기록된 요한복음은 여기에 더 큰 방점을 두어서 역사적 예수의 몸을 일반적인 헬라어인 ‘소마’(몸)라 부르지 않고 굳이 ‘사르크스’(살덩어리)라고 부르는 이유이고 부활 예수 또한 제자들과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는 약간 억지스런 얘기까지 부연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부활의 바른 이해]
저는 부활은 사실로서 증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질문을 만들어내기에 부활은 예수 운동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국과 영생이라는 개인/종교적 관점이 아닌 하느님 나라라는 정치/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부활 anastasis라는 헬라어 단어 문자적 뜻은 ‘일어서다’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을 영생에 연결하여 해석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저항의 의미로 읽혔다는 것입니다. 이미 바빌론에서 살아가던 예언자 에스겔에게 그발강가 광야에 널려진 마른 뼈들이 뼈를 맞추고 살이 돋고 생기가 들어가 하나의 거대한 군대로 일어서는 환상을 보여 주고 나서 곧 남왕국과 북왕국의 이름이 새겨진 두 막대기를 하나로 붙들고 있으라는 명령이 이어지는데, 이는 부활이란 개인 영혼 구원이 아닌 통일국가의 회복이었습니다.
4월은 유난히도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이 난무한 달입니다. 1948년 4월 3일은 제주도민 전체 10분지 1이 넘는 3만 명이 무참히 살해당한 제주항쟁의 날입니다. 1960년 4월 19일은 김주열을 비롯한 수백 명의 민주 시민들과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이승만 독재에 저항한 민주항쟁의 날입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은 304명의 생명이 충분히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날입니다. 가족들은 말합니다. 당일 현장에서는 구조보다는 감시가 먼저였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구조를 위해 달려온 이들을 돌려보냈습니다.
4월 3일, 4월 19일, 4월 16일 여기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4월의 날이 있는데, 그건 4월 9일입니다. 박정희유신독재의 절정의 해인 1975년 4월 9일에 새벽 인혁당 관련 8명의 사형집행이 있었습니다. 대법원 사형 판결이 있기도 전에 사형판결문이 군검찰부에 이미 와 있었던 사실만으로도 청와대 권력의 직접 개입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사건입니다. 당시 가족들이 당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다음의 얘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동네 아이들이 하재완씨의 세 살 먹은 어린애를 끌어다가 목에 새끼줄을 묶어놓고 빨갱이 자식이니 총살해야 한다는 놀이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빨갱이가 뭔지 총살이 뭔지 무엇을 알았겠습니까? 부모님들과 마을 어른들의 공공연한 손가락질을 통해 미움을 배운 것이지요. 지금은 박정희유신독재가 저지른 조작으로 판결이 났지만, 당시 이 사건은 한 사람의 저항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이 또한 역사 속에 그냥 묻혀 있을지도 모를 사건입니다.
그 한분은 시노트 신부입니다. 4월 9일, 사형장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주검만이라도 돌려 달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 끌려가는 사진이 외신에 크게 실렸습니다. 이후 신부님은 시신 확인 과정을 전 세계에 알렸고 이로 인해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했던 것입니다. 후에 시노트 신부님은 인혁당 사건이 BBC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나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신부님은 곧 바로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했었고, 87년 6월 항쟁 이후 14년 만에 입국하여 인혁당 사형수 8명의 가족과 눈물의 재회를 했으며 〈1975년 4월 9일〉이란 책을 통해 인혁당 간첩조작사건을 보다 자세하게 증언했습니다.
[부활절을 앞둔 국가 폭력]
엊그제 성금요일 강남향린교회는 재개발로 인해 이전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갑자기 예고도 없이 교회 집기들이 강탈을 당하고 예배당에 들어갈 수 없는 철조망이 쳐지고 용역 어깨잡이들이 지키는 현장으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평가액이 너무 낮기에 법으로만 항의하고 있었던 것인데, 물리적 폭력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본과 경찰 그리고 법원이 결탁이 되어 일어난 또 하나의 국가 권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 당일 금요일 밤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비아돌로레사 14처 기도회를 향린공동체 이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날 교인인 이종민집사가 드린 기도문입니다.
십자가를 진 예수가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을 힘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이천년 전 그날처럼,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심장이 도려내어지고 살갗이 벗겨지는 장면을 우리는 오늘 허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안에서 예배하고 식사를 나누며 교회를 이룬 강남향린은 오늘 처참하게 유린당하였습니다.
아니 주님이 유린당한 것입니다.
아니 주님이 살해당한 것입니다.
그저 건물과 십자가와 피아노를 잃은 것이 아니라
김경호목사가 개척하며 함께 새로운 교회의 꿈을 키우던 20년전의 간절함을 잃은 것입니다.
이병일목사와 함께 옥상텃밭을 일구며 생명을 움틔우던 그 정성을 잃은 것입니다.
김수산나목사와 함께 교회의 미래를 꿈꾸던 소망을 잃은 것입니다.
찬송가 페이지 사이사이에 스며있는 고백과
식탁과 식기위에 놓인 서로의 이야기와
회의록에 담겨있는 열정과
주일학교 그림위에 실린 어린이들의 꿈이
폐기물처럼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사를 준비하며 하나하나 물건에 담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박탈 당한 것입니다.
이 일을 저지른 자들은 누구입니까?
법원 집행관도 아니고 용역깡패도 아닙니다.
바로 교회의 이웃입니다.
돈의 노예가 된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우리의 이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 것은 대제사장도 아니고 빌라도도 아니고 예수의 이웃이었습니다.
로마의 평화 아래, 대제사장과 장로와 율법학자들의 낡은 가르침 아래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믿은 예수의 이웃이었습니다.
돈이 로마요, 돈이 목사요, 장로인 이 사회에서 부활절을 앞둔 교회를 철거해도 아무런 감정이 없는 우리의 이웃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벌이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린 성금요일.
십자가에 달린 강남향린교회를 바라봅니다.
이 고난을 통해 참된 부활의 신앙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활하여 갈릴리로 향하신 예수는 지금 이 순간 십자가도 없이 싸늘하게 식은 예배당 안에서 홀로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 예수를 우리가 구원해야 할 때입니다.
빼앗긴 이들의 친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지금 이 시간 이분들은 철벽이 쳐진 교회 건물 밖 거리에서 부활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거리는 성문 밖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했던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골고다 언덕 위 무덤가입니다.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말합니다. “고통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고통을 없애려고 투쟁할 때에만 고통은 의미가 있다.” 십자가 죽음의 사건을 부활 승리의 사건으로 고백하려면 우리가 먼저 십자가의 사건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지, 십자가만 바라보고 입으로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노래한다고 해서 부활이 보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거리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강남향린교회야 말로 부활을 경험하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부활은 죽은 시체가 살아났다는 말이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무리들 속에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능력의 영으로 희망의 영으로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문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그렇다면 부활의 영이 들어가는 천국 문에는 무엇이라 씌어 있겠습니까?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너희 자신이 곧 희망이니라.’라고 쓰여 있겠지요. 예수께서 자신의 몸, 곧 그 살과 피를 우리로 하여금 나누어 먹도록 부탁하신 것은 바로 자신이 국가폭력으로 인해 살해당했던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고, 그리고 오늘의 갈릴리의 현장으로 가서 억눌린 사람들 편에 서서 역사의 진실을 밝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이유인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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