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한국사회] 현실의 회복 / 김규항
오늘 한국의 부모들은 대학졸업장이 인생의 질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물론 여기에서 ‘인생의 질’은 전적으로 경제적 기준에 의한 것이다. 간혹 ‘경제적 기준이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기준일 수 있는가?’ 반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 역시 제 아이의 교육 문제에서는 그런 기준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들 말한다. “잘못된 건 알지만 현실이 …” 그런데 그 현실주의는, 오늘 한국의 부모들이 입술을 깨물며 다짐하는 그 현실주의는 정말 현실적일까?
지금 아이들이 대략 한 해에 60만명이다. 대학 정원이 늘어나서 안전하게만 지원하면 대학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인생의 질’과 관련 지어 유의미하고 즉각적인 효력을 갖는 대학과 학과는 극히 일부다. 서울대의 일부, 연·고대의 더 적은 일부, 그리고 몇몇 대학의 그보다 더 적은 일부가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걸 다 해서 3만명이라고 해보자. 60만명 가운데 3만명이면 5퍼센트다.
그런데 그 3만명이 전국에서 고루 나오는 건 아니다. 올해 연·고대 인문계열 신입생 가운데 외고 출신이 40퍼센트를 넘겼다는데, 이런저런 특목고들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로 본다면 지금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면 그 3만명의 적어도 절반 이상은 특정 지역 혹은 특목고 출신이 차지할 것이다. 결국 보통의 아이들이 대학입시를 통해 유의미하고 즉각적인 ‘인생의 질’을 확보할 확률은 2.5퍼센트 이하인 셈이다.
2.5퍼센트 이하의 가능성은 어떤 것인가? 이를테면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살 가능성이 2.5퍼센트 이하입니다”라고 말할 때, 혹은 “살지 못할 확률이 97.5퍼센트 이상입니다”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는가? 그런 가능성을 두고 맘껏 뛰어놀아야 할 초등학교 적부터 감옥의 수인들처럼 학원을 돌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부모들은 줄잡아 10∼20년을 잔업 특근에 매이고 노래방 도우미까지 해가며 아이들 ‘옥바라지’를 하며 사는 게 과연 현실적일까?
비슷한 이야기로, 한국의 직업이 대략 1만개다. 우리 아이들은 나중에 1만개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부모들이 제 아이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생각하는 직업은 몇 개인가? 10개? 기껏해야 20개 안쪽이다. 1만개의 직업을 갖고 살아갈 아이들에게 20개의 직업만을 생각하며 몰아붙이는 부모들을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오히려 9980가지 직업을 갖고 살아갈 아이들을 인생의 낙오자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닐까?
오늘 한국의 부모들은 너나없이 교육 문제에 대해 가장 현실적인 태도를 가진다고 믿지만 실은 현실이 주는 공포와 불안, 즉 ‘이런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내 새끼가 도태되면 어쩌나’ 하는 공포와 불안에 짓눌려, 최소한의 계산도 못 한 채 아이들과 자신의 소중한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이 지옥이 지나면 행복한 미래가 도래할까? 인생은 그렇지 않다. 지금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줄 모른다.
우리는 이 지옥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 출발은 우리가 현실주의라는 이름의 몽상을 버리고 현실적인 태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아이가 대학을 갈 수도 있지만, 가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고민하는 것이다. 아이가 제 재능과 적성을 일찌감치 발견하여 대학을 가지 않고도 자존감을 유지하며 진정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게 되겠냐고? 왜 안 되는가? 2.5퍼센트의 가능성이 97.5퍼센트의 가능성으로 바뀌는데, 20개의 직업에 대한 집착이 자그마치 9980개의 선택으로 바뀌는데.
한겨레신문 2008.12.17
'사랑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의 폭설(3/10) (0) | 2010.03.12 |
---|---|
3/9 시교육청 앞 결의대회 (0) | 2010.03.12 |
루저 김규항 (0) | 2010.02.23 |
[야! 한국사회] 개털아비의 천국 김규항 (0) | 2010.02.23 |
그 아이들은 정말 앞선 걸까? 김규항 (0) | 2010.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