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한국사회] 그 아이들은 정말 앞선 걸까? 김규항
무리하게 상향지원만 하지 않으면 대부분 대학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대학을 나와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부모들의 믿음에 부응하여 지방엔 미달인 학과도 있을 만큼 대학 정원이 늘었기 때문이다. 독일 고등학생의 상급학교 진학률이 40% 남짓인데 한국은 90%에 가깝다. 그러나 ‘대학을 나와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믿음에 부응하는, 즉 대학 졸업장이 이후 삶의 경제적 안정성으로 분명히 연결되는 비율은 고작 2.5% 남짓이다.(필자의 지난 칼럼 ‘현실의 회복’ 참조)
그리고 2.5%는 매우 빠른 속도로 강남 혹은 상층계급 아이들로 채워지고 있다. 사교육 산업이 비정상적이리만치 고도로 발달하고 서열화하면서(‘386 운동권 출신들’의 맹활약!) 부모의 부가 아이 성적을 결정하는 가장 주요한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서민 동네의 학원에 다니는 아이가 강남 학원에 다니는, 혹은 강남 학원가에서 잘나가는 강사를 붙인 상층계급 아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과연 이걸 경쟁이라 할 수 있을까? 경쟁이라는 건 얼마간의 조건 차이는 있더라도 누구에게든 이길 기회가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것 아닌가. 이건 경쟁이 아니라 ‘경쟁을 가장한 신분화 쇼’일 뿐이다. 상층계급 아이들이 2.5%를 독식하고 나머지 97.5%의 아이들은 함께 경쟁하는 시늉을 하는 쇼. 적긴 하지만 일류대 신입생 중에 서민가정 출신 아이들도 있다고? 물론 그렇지만, 그런 ‘특별한’ 사례는 경쟁의 근거라기보다는 이 쇼를 은폐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미국에서 음악이나 스포츠로 상층계급에 오른 극소수 흑인들이 미국이라는 신분사회를 은폐하는 근거로 사용되듯.
쇼는 이명박 정권에 이르러 더욱 화려해지고 있다. 상층계급 아이들은 이젠 일류대학이 아니라 특목고에서, 국제중에서부터 일찌감치 동아리를 이루어간다. 서민 부모들은 울분에 찬다. ‘출발점의 차이’니 뭐니 하며 분을 내보지만 쇼는 오히려 더 화려해져만 간다. 가랑이가 찢어지더라도 따라가야 한다고 다짐해보지만 늦은 밤 지친 얼굴로 돌아온 아이를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아, 무능한 나 때문에 내 새끼의 인생이 막히는구나.’
나 역시 개털 아비인데 그 심정을 왜 모르랴. 그런데 잠시 울분을 삭이고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그 아이들은 정말 앞선 걸까? 부자 부모 덕에 우리 아이들을 따를 수 없이 앞서가는 그 아이들은 정말 ‘인생에서도’ 앞선 걸까?
<고래가 그랬어>엔 ‘고래토론’ 꼭지가 있다. 아이들이 한 주제를 가지고 저희들끼리 마음껏 떠들어대는 꼭지다. <고래가 그랬어>가 74호까지 나왔는데 고래토론에 실패한 게 딱 두 번이다. 둘 다 부자 동네의 초등학교에서였다. 그 한 주제는 ‘공부만 하느라 놀 시간이 없어요’였다. 그런데 막상 토론이 시작되자 아이들이 입을 모아 그러는 것이다. “경쟁 당연히 해야 한다.” “경쟁에서 이겨야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살 수 있다.” “경쟁에서 이겨 힘을 얻어야 사회에 좋은 일도 할 수 있다.”
다음날 급히 섭외한 미아동의 한 초등학교에서 다시 토론을 마친 다음 편집장과 둘이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 아이들이 정말 앞선 걸까요?” “그 아이들이 일류대를 독차지하고 일류직업을 독차지하고 또 저희들끼리 교우하고 결혼하고 귀족처럼 살아가겠지.” “그렇죠. 그래서 다들 부러워하고 억울해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전 섬뜩하더라구요. 겉모습은 아이인데 완전히 중늙은이더라구요.” “그래, 알고보면 참 불쌍한 아이들이지.”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2010.01.20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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