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노예를 위한 변명 / 김종철
요즘 내 주변에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이 많다. 사는 게 너무 재미없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들은 호소한다. 인간이 자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저 조건인 민주주의의 원칙들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도처에서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 자신도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나도 이제 늙었는데, 흉한 꼴 아예 외면하고 조용히 지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했으면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역사책을 보면 문명이 시작된 뒤 인간의 삶이란 강자의 약자에 대한 끝없는 괴롭힘, 착취와 약탈의 연속이라는 것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다 민초들의 단결된 저항으로 지배자들이 조금 양보하는 척하지만, 그것은 극히 드문 순간일 뿐, 또다시 무자비한 침탈과 억압과 속임수가 한층 더 교활한 형태로 되풀이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대체로 강자들의 시각으로 작성된 기록이다. 그럼에도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들여다보면 인간사를 관통하는 원리가 ‘악마의 정신’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럴 바에야 뭣 땜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피나는 싸움을 해야 하는지, 심각한 회의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어떤 젊은 기자한테서, 한때 민주화에 헌신했던 몇몇 원로작가에게 4대강 문제에 대해 발언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거절 이유는 한마디로 피곤하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이해할 만했다. 수십년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웠고, 그 결과 얼마간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 지켜지는 듯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기분 속에서 노년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제 순식간에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린 그 민주주의를 생각하면 얼마나 서글퍼지고 기운이 빠지겠는가.
게다가 국가권력의 전횡을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민초들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깨어 있느냐에 달렸는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결핍되어 있는 게 올바른 ‘정치교육’이 아닌가. 흔히 ‘욕망의 정치’라고 부르는 게 바로 이런 정치교육의 결핍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이다. 즉, 안락과 안전에 대한 헛된 꿈 때문에 자유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우리들 중 다수는 지금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절반을 넘는다고는 하지만, 끔찍한 무지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도 허다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근 내가 거리에서 만난 한 택시운전사는 우리나라가 물 부족 국가이기 때문에 ‘4대강 사업’이 꼭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어째서 물 부족 국가라고 생각하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요즘 많은 사람들이 생수를 사먹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이 터무니없는 말은 그냥 웃고 넘길 게 아니다. 그 택시운전사를 포함하여 생계유지에 급급한 많은 우리 이웃들은 지금 어용언론 이외에 독립적인 미디어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중대한 문제가 여기에 내포돼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살아나자면 가령 <한겨레>를 보는 사람이 크게 늘어나야 하지만, 문제는 한겨레 독자들이 생활 속에서 대개 고립되어 있거나 한겨레 독자들하고만 주로 소통하고 지낸다는 점이다. 사실 나 자신도 저 택시운전사의 터무니없는 얘기를 듣고도 더는 응대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아마도 나와 같은 승객만 계속해서 만나는 한, 그 택시운전사는 점점 더 자신의 신념을 굳혀갈 것이고, 그 결과 자신의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권력의 맹목적인 지지자, 즉 ‘노예’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노예는 원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이다. 고통을 느낀다면 그는 자유인이다. 그러나 노예더러 자유인이 되자고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육신의 안락과 안전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길들여져 있는 노예에게 자유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한겨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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